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모토 료마 (문단 편집) ===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 > (료마가 선중팔책으로 정권봉환을 건의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논증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 (龍馬が「船中八策」で政権奉還の建白をしたとされる)事実が史料に基づいて論証されたことは一度もない >---- > 아오야마 타다마사 (青山忠政, 2006) >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고토 소지로에게 건의했다”는 카더라 뉴스(という物語)가, 몇번에 걸쳐 인용되던 도중에 <선중팔책>이라는 문헌으로 결실을 맺고,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 坂本龍馬が大政奉還を後藤象二郎に建言した、という物語が、数度の引用を繰り返すうちに『船中八策』という文書として結実し史実となってしまうのである >---- > 치노 후미야(知野文哉, 2013)[* 선중팔책이 허구(p.253)임을 논증한 연구. 대정봉환론 자체도 료마의 오리지널이 아니고, 견문으로 들었지만, 고토 소지로에게 '''관련 내용을 건의했을 가능성은 높다''' 정도로 갈무리했다. 또한 마치다 아키히로 (2019)는 대정봉환의 베이스가 되는 대조리大条理)에 료마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았다.] p.17 > 또한 료마가 키도와 사이고의 사이를 알선해서 <삿쵸동맹>을 완료했다라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전부 메이지 이후의 창작에 불과하다. > また、龍馬が木戸と西郷の間を周旋して「薩長同盟」を成し遂げたとする一次史料は存在せず、全て明治以降の創作に過ぎない > > 료마의 역할은 <삿쵸동맹>보다도, ''삿토맹약의 성립에 무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울인 글씨는 연구서 본문의 강조에서 따옴] > 龍馬の役割は、「小松・木戸覚書」よりも''薩土盟約の成立に重みがあった''と考える >---- > 마치다 아키히로(町田明広)[* [[간다외어대학|칸다외국어대학]] 교수. 주 연구분야는 사츠마번을 중심으로 한 막부말기의 정치사, 메이지유신 및 당대의 대외인식론([[존황양이|존황양이론]])이다. 메이지유신사학회 회장 및 책임국장] (2019), p.173-174 & p.236 료마는 그 업적이 과대평가 받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2.jpg|width=100%]]}}} || 2017년에는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요시다 쇼인]]과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이름을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삼국지가 한중일 삼국에서 인기를 끌고 대중들의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교과서에서 중국사를 배울땐 그 시절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도 될 듯. 2022년 [[닛케이]] 비즈니스에서 "[[https://business.nikkei.com/atcl/plus/00031/031800006/|사카모토 료마의 전설은 거짓 투성이 「막말에 맹활약」은 틀렸다]]"라는 기사를 내서, 료마의 과대평가 논란을 요약했다. >막부 말미에 맹활약했다는 이미지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사카모토 료마.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등의 소설을 읽고 '[[삿쵸 동맹]]'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료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정봉환]]의 일등공신이었다'고 믿는 분도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학의 관점에 서면 실체는 전혀 다릅니다. 위와 같은 그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저것도 거짓말이다, 이것도 거짓말이라는 느낌으로 '거의 진실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龍本龍馬)는 일본사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시바 씨도 소설의 주인공(竜馬)과 역사상의 인물(龍馬)을 구별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실존인물 [[홍길동]]은 한자가 다른 것처럼 료마의 한자가 다르다. 카쿠 코조는 사카모토 료마나 신센구미처럼 역사적 기록이 불명확하고 모호한 인물이 소설가들이 창작을 가필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영웅화가 되었다고 평했다.] >---- > 카쿠 코조(加来耕三, 2022)[* 닛케이 비즈니스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U0r8BkGMwyM|BS11의 한 코너에 출연해 사카모토 료마를 언급하고 있다(일본어 주의).]] 정리하자면, 시바의 소설이 료마라는 역사상의 인물상 자체를 뒤틀어버렸고, 그의 소설이 대중들로 하여금 료마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꿈꾸던 사람이었는지 그 본모습을 알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위인은 맞지만, 대중의 머릿속 이미지와 실제는 상당히 괴리된 셈.] 료마를 둘러싼 과대평가/반박 전쟁에 들어가기 앞서, 료마를 일종의 신화적인 인물로 만든 [[시바 료타로|시바사관]](司馬史觀) 자체가 2차대전 패배 후 '''왜 일본이 이렇게 폭망했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작용이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시바 사관이란 소위 '''옛날 일본은 참 괜찮은 나라였는데 쇼와로 넘어오면서 바보가 되었다'''는 식으로 패전 후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대신, 쇼와를 기준으로 꼬리를 자르고 "잘 나갔던 일본! 위대했던 막부 말기 유신 영웅들!" 식으로 쇼와 이전과 대비한 과거 일본, 특히 막부 말기 일본을 찬미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시바 료타로]]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시바사관은 역사적 고증 그 자체보다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과 사상에 경도되는 면이 강하다. 당장 시바 료타로 본인부터 고증 조사는 철저하지만 딱히 100% 고증을 지키며 저술하는 역사학자가 아닌, '''소설가'''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시바 료타로 또한 당시 일본의 저런 분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거기에 한 몫을 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들이 말하는 다이쇼 시대 등 '''위대했던 일본'''이 본래부터 위태위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걸 부정하고 메이지 시대 등 그 영광이 극에 달했던 시대를 회고하며 스스로를 달래는 게 시바 사관의 핵심이다. 한 마디로 일종의 '''국뽕'''인데, 사카모토 료마는 이런 과거사 미화 과정에서 선택받은 일종의 '메이지 시대 건국신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딱히 일제와 큰 관련도 없으니 아낌없이 좋은 말을 덧붙일 수 있고, 소설의 팬도 많다보니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중적 이미지와 실제 사카모토 료마 사이의 괴리감을 현대 사학자들이 지적할 때마다 소설의 팬들이 나서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료마 팬덤'은 비단 일반인들 뿐만이 아닌 진지한 일본 사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학자들 또한 국뽕이나 애국심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 심지어 따지고 보면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시작된 일제 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들조차 단순히 '일제와 비교적 관련이 적은' 영웅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찬란했던 메이지 시대''' 운운하는 시바 사관에 동조하여 아이돌 보호하듯 료마라고 하면 일단 덮어놓고 비호하는 팬들이 많다. 물론 사카모토 료마가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는 일개 탈번 낭인 무사 주제에 소설 이미지로 먹고사는 한량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겠지만, 반대로 '역사적인' 사카모토 료마를 논하기 위해 소설 등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걷어내고자 하는 것조차 료마에 대한 '공격'이라며 열을 올리는 건 지양해야 할 것이다. 료마가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이유와 반론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 1. 단지 삶이 특이해서 작가가 주목해서 쓴 소설(료마가 간다)이 흥행해서 주목받는 것 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유 중 하나로 작가 시바 료타로가 소설의 흥미를 끌기 위하여 있지도 않은 일들(예를 들어, 선중팔책)이나 인물로서 흥미로웠던 사카모토 료마를 긍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반박 : 초기 작품들이 역사 사실에 맞지 않는다는 평을 듣고 난 후 작가인 [[시바 료타로]]가 사실 반영에 특별히 신경 쓴 작품이 '료마가 간다'이다. 실제로 읽어 보면 작가가 직접 발로 뛰며 실제 장소를 방문하고 노인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역사적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바 료타로는 어디까지나 사학자가 아닌 소설가고, 사료 조사에 철저하기는 했으나 재미 등을 위해 의도적으로 고증을 무시하거나 재구성한 사건도 많으니 '''시바 료타로가 제대로 조사하고 썼으니까 사실이다!''' 하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치노 후미야(2013) 등의 연구에 따르면 시바 료타로를 포함한 후대의 문인들은 있지도 않았던 선중팔책 등을 창작해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 2. 유일한 업적이라는 사츠마-쵸슈의 동맹(삿쵸 동맹)을 맺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이루지못한 탈번(脱藩)한 [[로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탈번이란 일본의 영주가 다스리는 행정구역인 번(藩)에서 나온 것. 당시 계급사회였던 일본, 특히나 사무라이가 섬겨야할 주군을 버리고 나오는 것으로 중죄에 속하였다. 원래 무사계급은 군사계급이므로 허가없이 주거지를 변경할 자유가 없었기에 당시에는 중죄였다. 다만 막부 말에는 뜻을 이루고자 탈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료마는 [[삿쵸 동맹]]을 맺도록 도와준 것 밖에 없고 [[보신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싸웠던 주요 세력으로는 사츠마([[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 이후로 일본 해군)와 쵸슈(오무라 마스지로가 지휘, 이후로 일본 육군)다. 또한, 그들 뿐만이 아니라 도바·후시미의 싸움에서 신정부군으로 가담하는 도사 번의 진쇼타이(迅衝隊, 신충대)가 구 에도 막부군 군중들 중에서 가짜 이름으로 위장하고 거사를 꾸미던 신센구미하고도 대치하며 맞서나갔다. 신정부군 가담 번으로서 삿쵸토와 협력하였던 사가 번(옛 지명 : 히젠 번)은 영국 원정 무기 유학생들을 양성하고 사가 번제 암스트롱 포를 제조->조종하여 막부 소속(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불패 번이라고 불리우는 쇼나이 번을 공포로 몰아넣었다는 전투 내역을 전개하였다. * 반박 : [[삿쵸 동맹]]은 [[메이지 유신]]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인 사건이었다. '동맹을 맺도록 도와준 것 밖에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절하다. 또한 료마는 [[보신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당연히 직접 전쟁에 참여해 싸울 수가 없었다. * 3. 위험한 방식으로 국가전복을 노렸다. 성공했기에 평가받는 것이지 실패했으면 테러리스트 취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시에는 막부가 힘이 없음에도 각종 주도권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모든 양이지사들 특히나 근왕(황)파들은 막부의 시선으로 보면 정부를 전복시키고 새롭게 편성하려는 위험인물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수의 이견이 있다. 료마가 [[대정봉환]]을 기안할 때,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대표되는 다수의 막부측 인사가 포함되도록 숙안을 내밀었다. 그가 반막부 세력으로의 [[유신지사]]이긴 하였으나 타 지사들처럼 막부의 완전한 해체 혹은 타도보다는 신 정부(공무합체 정부) 수립에 더 중점을 두었다. 실상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는 근황파 사이에서도 약간 겉도는 입장이었다. 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굉장히 혐오하였다. * 반박 : 각주에 설명되어 있듯이 사카모토 료마는 테러 행위와는 연이 없는 인물이었고 오히려 유신지사 중에는 온건한 편에 속했다. 료마가 '위험한 방식으로 국가전복을 노렸다'거나 '테러리스트'라는 비판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단, 료마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을 제시하고 이를 요시노부가 채택했다는 건 메이지 이후의 창작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소위 말하는 선중팔책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대정봉환]]의 내용도 료마의 오리지널이 아니며, 대정봉환의 베이스가 되었다는 대조리(大条理)에 료마가 관여되었다는 점도 어디까지나 증거 없는 가설의 영역에 불과하다.] * 4. 상인이 되겠다면서 해원대를 창설했지만 당시의 상인이라는 것은 시대상황으로 보나 안 좋은 인상을 남길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외국의 것을 보고 익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주장은 더더욱. 게다가 무기를 넘겨주는 등의 행보나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의 상인]]이라 비판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상인이라는 것은 일본의 사농공상에서의 상인이 아닌 외세, 서양의 [[무기상]]이다. 무기를 파는 그들 입장에서는 비지니스가 잘된다면 손해볼 일도 없었다. * 반박 : 당시 쵸슈 번이나 사츠마 번이 막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서양 신식 무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부족한 무기들을 조달한 것인데 그것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판하고 근거 없이 '그 당시에 시대상황으로 상인은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느니 비난하는 것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 5. 사카모토 료마의 공적이라고 여겨지는 삿쵸 동맹이나 대정봉환 역시 어느정도 관여했는지는 사실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이 세간에서 여겨지는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상당수에 이른다. 사츠마 번의 주요인물이자 메이지 정부에서의 중요인사 였던 시마즈 히사미츠의 측근이었던 이치키 시로(일본에서 최초의 사진을 찍은 사람)의 지적에 따르면 삿쵸 동맹이 실효된 것은 료마가 참여했던 1866년 3월 회담이 아니라 1867년 당시 사츠마 번주가 쵸슈 번과 회담을 가진 후의 일이다. 즉, 후세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료마의 역할이 과장되었다는 측면이 있다. 그 밖에도 료마가 사츠마의 지시로 움직였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실제로 료마가 테라다야 사건 당시 도망치며 미처 챙기지 못한 유류품들이 압수당했는데, 이를 시이나번사(立見尙文)가 필사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정식 문건은 아니지만 료마의 비망록, 혹은 미요시(三吉)의 메모로 추정되는 새 사료에 의하면 료마는 이미 1866년 1월 경에는 사츠마 번사 혹은 사츠마번의 에이전트로써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해당 사료는 키도의 서간문에서 밖에 발견할 수 없었던 6개 조문의 내용 일부도 포함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마치다, 2019)] 사츠에이 전쟁 이후 료마가 사츠마번에 포섭된 과정은 코마츠가 오오쿠보에게 보낸 서간문(11월 26일)을, 사츠마 번사로서 료마의 활동과 역할에 관해서는 마치다 아키히로(2019)의 연구서를 참조할 수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료마가 코마츠 저택에 도착한 21일엔 이미 협상은 끝나있었기 때문에 료마가 쵸슈와 사츠마 사이를 주선할 건덕지나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당시 두 집단 사이에서의 협상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있어 사츠마 측 제안처럼 구두 협약으로 마무리하느냐, 쵸슈 측 제안처럼 증빙 서류를 작성하느냐 하는 점만 남았었기 때문. 실제로 당시 료마가 도착했을 당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반나절 정도'''에 불과했는데, 여기에 대해선 료마가 신들린 협상력으로 반나절만에 두 집단의 갈등을 봉합하고 조약을 맺게 했다는 쪽보다 이미 완료된 협상의 부수적인 부분에 이름을 남겼다는 쪽이 현실적이라는 논증이다. 소위 말하는 '''료마가 보증한 직필문''' 또한 그 과정 중 하나라는 이야기. 여기서 말하는 코마츠-키도 각서, 다시 말해 삿쵸동맹 6개조문의 형성 과정과 성격 및 의의, 료마의 역할에 대해서도 해당 연구서 참조.] * 반박 : 물론 후세의 사람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삿쵸동맹을 성사시킨 협상의 주도자 료마'보다 실제적인 활약이 적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사카모토 료마 정도로 소설의 이미지가 확대되고 재생산되면 당연히 그 업적에 (문자 그대로) 거품이 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애초에 두 집단 사이의 협상이라는 건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닌 만큼 1866년의 회담이 1867년 회담과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한 마디로, 료마가 주도적으로 나서 모든 갈등을 마무리한 건 아닐지언정 그저 서명 하나만 남긴 외부인 1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 * 6. 료마는 업적도, 이름도 없는 탈번 낭사였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의 집안은 전당포를 하다 무사 직위를 돈 주고 산 부자 가문이었던 만큼 당시 주류 정치 세력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런 료마가 어떻게 쵸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의 담판을 이끌어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기도와 사이고는 상급 무사까진 아니어도 번에서 나름 인정받는 가신이었는데 탈번 낭사의 말만 믿고 원수나 다름없던 삿쵸가 손을 잡았겠느냐는 의문이다. 이렇게 되러면 쵸슈와 사츠마 양쪽에 깊은 친분 또는 이권이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할 텐데, 당시의 료마로서는 도저히 그럴 역량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래서 등장하는 사람이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글로버. [[https://ja.wikipedia.org/wiki/%E5%9D%82%E6%9C%AC%E9%BE%8D%E9%A6%AC#%E7%95%B0%E8%AA%AC|일본 위키피디아]]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글로버 가설을 미는 주요 인물로 작가 [[https://ja.wikipedia.org/wiki/%E5%8A%A0%E6%B2%BB%E5%B0%86%E4%B8%80|카지 마사카즈(加治将一)]]를 거론하고 있으며, 대략적인 근거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자민 매터슨의 상하이 지사 출신이자 무기 상인인 글로버가 막부에 대항하려는 쵸슈와 사츠마에게 보다 더 많은 무기를 팔아먹게 하기 위해 상하이 밀수법을 소개하고 사츠마 이름으로 쵸슈에 무기를 사게해주는 등, 실질적으로 두 번의 관계 개선을 물밑에서 작업했다. 여기서 실무를 담당한 조직이 료마가 만든 회사인 '가메야마사츄'. 결국 료마는 어떻게 보면 글로버의 거간꾼, 내지는 행동대장에 불과하다라는 주장. 여기서 더 나가면 글로버의 모회사가 자딘&매터슨이고 이 회사의 모회사는 화폐전쟁에 나오는 로스차일드이며 결국 중국의 아편전쟁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모두 로스차일드의 손 안에서 움직였다는 것. * 반박 : 이러한 주장은 [[로스차일드]]를 근현대사의 온갖 사건의 주역으로 보는 전형적인 '유대인 음모론'일 뿐이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 내에서도 극우파들에게 잘못된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한 축이 바로 이러한 유태인 음모론이다. 애초에 토머스 글로버가 모든 무기 거래의 본체고 일본의 번을 막후에서 조종할 정도의 거물이고 사카모토 료마는 아무 영향력 없는 일개 탈번 낭사에 불과하다면, 본인이 직접 거래를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삿쵸와 거래할 이유가 없다. 또한 각종 문서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이름이 등장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사카모토 료마가 지사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기에 글로버도 사업을 위해 사카모토 료마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7. [[삿쵸 동맹]]은 료마 개인의 작품이 아니며, [[https://www.youtube.com/watch?v=E6mOMsATHSg|삿쵸 주선의 흑막이 따로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탈주 번사로 떠돌던 사카모토 료마를 에이전트로 채용한 인물은 당대 후쿠오카 번주였던 [[쿠로다 나가히로]](黒田長溥). 해당 영상에서 언급되는 정황증거로: 1. [[가고시마현|사츠마]](큐슈 남단)와 [[조슈 번|쵸슈]](혼슈 서단)의 사이에 놓여있는 [[후쿠오카]] 번(큐슈 북부)의 지정학적 요건; 2. 삿쵸 동맹의 초안문을 제안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츠키카타 센조(月形洗蔵)[* 후쿠오카번의 도막파(근왕양이) 번사그룹이었던 치쿠젠근왕당의 리더. 훗날 후쿠오카 번내의 정란에 휘말려 번주였던 나가히로에게 팽당하고 숙청당한다 (을사의 옥, 乙丑の獄, 1865). 정변의 성격 및 당시 나가히로가 내재한 자기모순적 모습 등에 대해서는 니시오 요타로(西尾陽太郞, 1967, 쿠로다 나가히로와 치쿠젠근왕파)의 연구를 참조.][* 상기 유튜브 영상의 주장에 따르면 이 치쿠젠근왕당 멤버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료마. 다만 료마는 막부 말기 근왕파 인물들 중에서도 약간 겉도는 온건파(막부에 덜 공격적)였고, 애초에 치쿠젠 출신도 아닌 떠돌이 심부름꾼이었기에 정변을 살아남았다고 한다.]가 후쿠오카 번사였다는 점; 3. 삿쵸를 화해시키기에 앞서서 나리아키라 파벌과 히사미츠 파벌로 쪼개졌던 사츠마번 내부를 추스릴 필요가 있었는데, 원수지간이었던 [[사이고 타카모리|타카모리]][* 후쿠오카 번과의 교류가 깊었던 사츠마번 소장파 번사그룹 카고시마 세이츄구미(精忠組)의 유력인사. 사츠마번 내 반대파 수장이자 국주였던 히사미츠에게 밉보여서 [[아마미 군도]] 오오시마 깡촌에 유배당한 상태였는데, 후쿠오카 번주였던 나가히로가 타카모리 정계 복귀에 도움을 준 은혜가 있었다고 한다.]와 [[시마즈 히사미츠|히사미츠]][* 히사미츠 파벌의 수장이자 당대 사츠마 국주. 시마즈 가문의 족보상 나가히로 아래 서열이었고, 나가히로(와 그 친구들)에게 외교전에서 참패한 경험([[오유라 소동]])도 있을 뿐더러, 집권 후에는 나리아키라의 공무합체 노선을 계승한 측면도 있어 마찬가지로 공무합체파였던 나가히로를 무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를 화해시킬 수 있는 인물이 나가히로였다는 점,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가설의 장점은 동맹 직전까지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사츠마와 쵸슈의 갈등을 탈번 낭인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대신, 큐슈의 거대 세력권이었던 후쿠오카 번의 정치적 중재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가설의 단점으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인데, 해당 영상에서는 나가히로의 개인적인 성품[* 나가히로를 언급하는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들과 해당 시기를 다루는 연구서 등에서도 나가히로가 가지고 있던 겁쟁이로써의 모습과 우유부단한 성품은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과 질풍노도의 막부말기의 시대적 상황[* 나가히로는 정계에 이름난 인물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이이 나오스케]],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이고 타카모리]], [[오오쿠보 토시미치]] 등). 심지어 탈번 낭인 신분이었던 료마조차도 유명세를 얻은 이후는 정적들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오미야 사건|암살당했다.]]]을 근거로 나가히로가 삿초 동맹의 크레딧을 버리고 숨어버렸다고 주장한다. 다만 학계에서 다수설은 아니며, 몇가지 흥미로운 점[* 나가히로가 집권하던 시절 사츠마와 쵸슈는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서로를 향한 직통 외교라인이 없었다. 따라서 삿쵸 양번은 후쿠오카 쿠로다(시마즈 방계) - 쵸슈 킷카와(모리 방계) 가문 사이의 파트너쉽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소통했다. 막부 말기 삿쵸 관계에서 <후쿠오카-킷카와 완충망>이 수행한 역할에 관해서는 카지와라 요시카즈(1992), 쵸슈 출병을 둘러싼 정치 정황 -후쿠오카 번의 쵸슈 중재 활동을 중심으로- 등을 참조.][* 마치다(2019)의 연구에 의하면 료마가 사츠마번의 에이전트로 포섭되어 큐슈로 들어갈 때도 킷카와 가문의 알선서를 써서 들어갔고, 사츠마번의 심부름꾼으로 쵸슈에 입국할 때도 킷카와 가문을 거쳐서 들어간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이 보이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고 (따라서) 연구 성과도 부실한, (재미있는) 가설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 반박 : '''증거가 없다.''' 무엇보다 나가히로는 료마 사후 거의 20년 가까이 살아있었으나, 정작 관련된 정치적 안건을 꺼내거나 언급한 적도 없다. 단순한 보신 성향 때문이라 보기도 힘든 게, 후쿠오카번의 지리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언급하는 이들은 '후쿠오카번이 그토록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협상의 막후 당사자인 나가히로가 살아있는 와중 그 얼굴에 먹칠을 하는' 보신전쟁이 발발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나름대로 정합성을 끼워맞출 수는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 상기 각주 등에서 언급되는 사료에서 등장하는 코마츠 타테와키의 역할과 의의 등 료마의 역할이 확대되었다는 연구는 많지만, 반대로 료마 또한 명확한 사료 등을 통해 실제 역사적 행적을 조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마따나 정황 증거 뿐이라는 건 료마의 역할이 부풀려졌다 이전에 그 역할을 대체할 가설로 삼기는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